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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설교(말씀) 예시 - 마태복음 5장 팔복,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한 가정 혹은 여러 가정이 연합해서 가정 예배를 드리면 좋은 영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서로 지체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물론, 가정예배를 드리다 보면 가족간의 갈등과 불화가 생기는 악한 세력의 방해도 많이 생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갈등의 요소들까지 가정예배를 통해 말씀으로 다루고, 연단하다 보면 가정이 더 견고해지고,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끈끈한 형제우애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씀을 전해야 할까요? 목회자가 아니라면, 많은 부담을 가지지 말고 먼저는 가장인 자신이 충분히 연구한 말씀을 가지고 쉽고 재미있게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가족들이 매 주 말씀이 기다려지고, 가정예배가 기다려지기 때문입니다.

 

아래 설교의 예시는 제가 마태복음 5장 본문을 잘 연구해서, 가정 예배 때에 전한 말씀입니다. 여러분들도 참고를 하시되, 꼭 여러분들의 가정의 덕을 세우는 예언의 말씀이 되기를 기도하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전하는 것은 자기와 가정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설교 주제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설교 본문 :

마태복음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1절에 나오는 '무리'는 4장 25절에 나오는 허다한 무리와 같습니다. 예수살렘 주변 모든 지역에서 소문을 듣고 갈릴리로 찾아옵니다.  '산에 올라가' 라는 구절 때문에 팔복의 교훈이 산상수훈이라고 일컫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누가복음에서 이 장소가 평지로 되어 있어서, 과연 이 말씀을 어디에서 하신거냐 라는 논란도 있습니다.

 

여하튼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팔복산은 갈릴리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타브가 라는 가버나움 근처 산등성이를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 팔복교회가 그 위치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 왼쪽 언덕 위에 있는 것이 팔복교회입니다.

 

출처 : 굿뉴스데일리

 

1절에 앉아서 가르치시는 것이나,  2절에 입을 연다는 표현은 엄숙한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 당시 랍비들이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이 이런 자세를 주로 취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라고만 되어 있는데, 마태는 '심령'을 넣었습니다. 가난한 자 라는 말은 원어를 참고했을 때, 자기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일컫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시편, 잠언, 이사야를 참고할 때 가난한 자는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자백하고, 하나님 앞에 당신 외에는 나를 구원할 자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복이 있다는 표현은 한 사람이 받는 모든 축복을 의미합니다. 육체는 물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리는 모든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또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할 때의 천국도 현세와 내세에서 누리는 모든 특권과 축복을 의미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신체검사입니다. 평생 한번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사람이 신체검사 1급을 받아 해병대를 가고 싶어서, 1급만 나오게 해주시면, 하나님을 잘 믿겠다고 고백을 해 버렸습니다. 눈도 난시가 심해서 1급까지는 어려웠는데, 놀랍게도 1급이 나왔습니다. 그 때는 정말 내 힘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던거죠. 하지만 내 힘으로 대학교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후에는 다시 복음을 듣지 않고도 정말 지금 행복하다 고백했을 정도로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죄인이고, 허물이 많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헬라어로 "호이 펜둔테스"로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나 자신 혹은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위로는 헬라어로 "파라칼레오" 즉, "곁으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괴로워하는 우리와 기꺼이 연합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단어입니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주하시지 않고, 절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축복을 알고도 죄자백과 회개를 한다는 것을 참 어려워합니다. 특히, 자신의 믿음에 자존심이 있는 자들은 애통하기 보다는 합리화를 하기 바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도 회개할 자로 여겨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내가 사라지는 것 같고, 내가 살아온 인생을 부인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땅은 잠깐입니다. 내세에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려면 진심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자기 허물과 죄를 애통하게 여겨야 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칼빈은 온유에 대해서 부드러운 마음, 노하기를 더디하는 마음, 절제할 수 있는 마음. 이렇게 세 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의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아래 시편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시편 37: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여기서의 땅은 꼭 영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땅이 현세에서의 축복일수도 있습니다. 저도 목장을 세우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좌하면 우, 우하면 좌 하며 이웃을 대해기 때문에, 민원 없이 축사가 세워지고 옆에 군유림까지 1600평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전국적으로 축산업을 하고 싶어도 허가가 안 나서 포기하는 청년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다만 구약에서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도달한 것처럼, 우리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가게 된다는 의미가 더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일 뿐입니다.

 

노하기를 즐기거나,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도, 이 땅의 기업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누가복음에서는 그냥 주린자라고 표현하지만, 여기서는 의에 주린 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굶주림과 목마름. 그 원인을 "의"에서 찾습니다. 즉,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의"라는 단어는 해석이 어렵고, 신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진정한 "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새하늘과 새땅을 사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물질적으로 어려울 때, 주리고 목마름을 느끼는 이 세대에서 진정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비전에 목마름을 느끼는 사람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 이라는 복을 받습니다.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는 먹이나 풀을 상징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어 가축을 비육시키는데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영의 양식을 살찌도록 채워 주시고, 비전대로 살 수 있게 풍성히 인도하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자비라고 해석되는 "엘레오스" 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구약으로 따지면 사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와 동일시되는 단어입니다. 이 용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만이 다른 이를 긍휼히 여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이 베풀어집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판단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바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카다로스" 입니다. 유대교의 정결 의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인데, 인간의 모든 죄의 원천인 정욕과 욕심에서 벗어나 정결케 되는 근본적인 영적 순결함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함에서 볼 것임이요는 헬라어 "와손타이"로 "호라오"의 미래형입니다. "호라오"는 "보다" 라는 단어 중에서 가장 높은 단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단계는 그냥 눈으로 본다는 의미인 "블레포"가 이고, 2단계는 주의깊게 눈여겨 본다는 의미의 "데마오마이"가 있습니다. 이 둘과는 달리 "호라오"는 경험을 통해 실제적으로 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헬라어로 "알다" 라는 "기노스코" 도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닌 경험한 것을 의미하죠. 

 

두 마음을 품고, 자기 정욕으로부터 승리하지 못하는 사람을 결코 실제적인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4장 8절에 보면,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정결케 하라 라는 표현이 있듯, 마음이 청결하려면, 어떠한 행동을 할 때 주님 때문인지, 내 욕심 때문인지 잘 분별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원어 형태소를 분석해 보면, 화평케 하는 자는 다른 말로 "화평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사람들간의 화평도 포함되지만,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궁긍적인 화평을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화평케 하는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게 됩니다. 당시에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을 벗어나게 하고 싶은 정치적인 목표의식이 뚜렷했던 제자들로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무력적으로, 정치적으로 정복하고 싶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의 진정한 화평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화목제로 드렸습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케 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아들다운 일이고, 가장 신경써야 할 일입니다. 도리어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먹칠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의를 위해 핍박받은 것은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행동했을 때 비난을 받거나, 복음을 전하다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제를 받는 것,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나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타인에게 고통받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앞에서 화평케 한다는 것이 사람 간의 관계에 있어서만 이야기 한다면, 사람들과 절대 갈등을 일으키면 안되기 때문에 사람과 타협해서 그들에게 핍박 받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화평케 하는 전도자로 살다 보면, 결코 세상 사람들이 그 사람을 미워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더 이상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복과 같이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11-12절도 10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10절의 핍박을 모욕받는 것, 박해받는 것, 비방받는것으로 더 확장에서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증오까지 언급 합니다. 10절에는 의를 위하여 라고 했지만, 11절에서는 예수님을 이유로 받는 핍박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각자가 받는 어려움이 과연 예수님 때문인지, 자기 허물 때문인지 진지하게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무나 명확하게 예수님으로 인해 핍박받는 사람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즐거워하라는 것은 헬라어로 "아갈리아오"인데, 기뻐하다의 "카이로"보다 더 큰 기쁨의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외부로 넘치거나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을 이야기 합니다. 

 

어떠한 고난이 있을 때, 정말 순수히 예수님으로 인한 고난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선지자나 사도들처럼 이렇게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절에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다고 하는데, 구약의 예를 생각해 보면 예레미야는 채찍을 맞았고, 스가랴는 돌에 맞았고, 이사야는 전승에 의하면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잠잠히 받아들여야 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산에서 전하신 팔복은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인 탁월함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난과 희생의 삶을 추구합니다.

 

오늘 팔복의 의미를 연구해봤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부음받는 자들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저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 죄인이고, 많은 허물로 인해 이 땅에서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제는 내 욕심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많은 사람을 옮은 곳으로 돌아오게 하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고난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내주하신 성령께서 저의 가는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오늘 팔복 구절에서 일곱가지 축복이 나오고, 그 축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여덟가지 항목이 나옵니다. 자기에게 부족한 항목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한 주간 이것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